度牒制)를 실시하여 승려의 수를 제한하는 등 억불정책에 의한 점진적 개혁에 의하여 불교폐단 방지를 이루고자 하였다.
존왕주의적(尊王主義的)인 유교역사관을 가지고 역사서술에 임하였다.
아울러, 그의 문하에서 권근(權近)․김종직(金宗直)․변계량(卞季良) 등을 배출하여 조선성리학의
성리학적 국가기반
조선은 고려말의 부정성과 새 왕조 건설의 정당성을 마련하기 위한 정책 채택으로 친명외교, 억불숭유 (억불숭유: 고려 말의 폐단과 정도전을 비롯한 유신세력의 규합), 사전개혁을 행했다. 도읍을 한양으로 옮기고 군제를 개혁하고, 정비도첩제( 度牒:중이 되는 증명서)(사대외
度牒制)를 폐지하여 승려가 되는 길을 원천 봉쇄하였으며, 3년마다 시행하던 승과를 철폐하여 불교종단을 해체하였다. 종단은 조선 초만 하더라도 11종이었는데. 태종대에 7종으로 줄고 다시 세종대에 선(禪) ․ 교(敎) 양종으로 줄었다가. 마침내 중종 대에는 종단 자체가 없어지고 말았다. 승려의 신
삼았다. 이에 불교는 점검 쇠퇴하여 천대를 받게 된 것이다. 사실 고려 이래로 불교의 폐단이 많아져서 태조 때부터 이에 대한 개혁에 착수하였으며, 태종은 시종일관 불교의 탄압정책올 써서 태조 때에 제정한 度牒制를 더욱 엄하게 했다. 그리고 고려 이후 전해 오던 國師·王師의 제도를 폐하였다.
却說燕王?入京後, 只魏國公徐輝祖, 尙抵敵一陣, 兵敗出走, 此外文武百官, 多迎謁馬前。
각설연왕체입경후 지위국공서휘조 상저적일진 병폐출주 차외문무백관 다영알마전
각설하고 연왕 주체가 남경에 들어온 후에 단지 위국공 서휘조만 아직 한 진영으로 적을 맞다가 병사가 패배하여 달아나고 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