攻西派, 남인 가운데 서학을 배척하는 파)의 지탄을 받고 10여일 간 유배를 가기도 하였다. 1792년에 홍문관 수찬이 되어 축성법과 『기중가설』을 지어 올려 수원성 축조에 기여하였다.
정조가 승하한 후, 벽파는 서학을 하였다는 구실로 시파 남인을 몰아내게 되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다산은 전라도
攻西派(홍낙안, 이기경, 목만중 등)의 공격이 시작되었다. 이들은 윤지충과 같은 南人이지만 僻派로서 時派를 공격하는 중요한 도구로 천주교를 이용하였다. 즉 분주폐제가 정치적 문제로 부상한 것이었다. 射手 역할은 洪樂安이 담당하였다. 그는 곧바로 좌의정이었던 남인의 거두 蔡濟恭에게 장문의
攻西派)가 분리해나가기 시작했다. 홍낙안 · 목만중 · 이기경 등이 정약용 등과 멀어지기 시작했다.
정조의 기대 아래 벼슬길 시작되다
28세 때(己酉年, 1789) 봄에 다산은 대과에 합격하여 희릉직장(禧陵直長)으로 발령을 받았다. 벼슬길이 시작된 것이다. 다산의 벼슬생활은 39세, 즉 정조가 죽은 해
급제한 후 이듬해 검열이 되었으나 공서파(攻西派)의 탄핵을 받아 해미(海美)에 유배되었다가 10일 만에 풀려났다. 곧이어 지평·수찬을 지내고 1794년 경기도암행어사로 파견되었다. 이듬해 동부승지·병조참의가 되었으나 주문모사건(周文謨事件)에 연루되어 금정찰방(金井察方)으로 좌천되었다.
후 천주교에 마음에 쏠리게 되었다. 이해 9월 정약용은 권일신을 代父로 하고 이승훈(神父 역할)으로부터 영세받아 신자가 되며 신앙의 전파를 위해 노력한다.
그러나 곧 <을사추조적발>(1785), <정미반회사건>(1787) 등을 거치며 안팎의 박해가 심해지고 南人은 信西派와 攻西派로 분열되기에 이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