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조의 학예사상
정조는 학문을 생활화한 군주였다. 일상생활에 근거한 실용학문을 제창함과 동시에 스스로 고된 경명행 수(經明行修)의 도(道)를 실천했다. 그의 학문적 기반은 종경(宗經)이었다. 문학의 근본 역시 종경(宗經) 이었다. 문풍은 정치현실의 반영이라는 전제에서 출
4. 연암의 문학관
박지원은 그의 한문 단편의 내용 속에, 또는 작품의 내용 앞, 뒤에 작품을 쓰게 된 동기 및 배경, 소재원(素材源) 을 몇 작품에서 밝히고 있다. 그것을 통해 살펴 본 연암의 문학관은 다음과 같다.
1) 眞문학론
연암은 ‘잡을까 말까 망설이는 순간 나비는 그만 훨훨 날아가 버린다
Ⅰ. 들어가는 말
박지원이 살았던 18세기 조선사회는 전 시대와는 확연히 달랐다. 17,8세기에 이르러 조선사회는 도시와 농촌에 걸쳐 커다란 변동이 일어나고 있었는데 이는 봉건사회의 구조나 이를 떠받치고 있던 이념에 균열이 생기고 있음을 의미한다. 즉, 사회 경제적 변모는 그 구성원들의 기분이
정조는 소설을 조선이라는 유교 질서를 전복시키려는 해악으로 보았다. 자유분방한 소설식 문체가 지배 언어의 전복을 꾀한다고 생각해 문체 반정(文體反正)을 단행하게 된다.
문체 반정의 대상으로 박지원이 쓴 《열하일기》류의 글이 지목 당했으며, 이러한 글들을 의고문체(擬古文體)와 패관소품으
이옥(1760-1815)은 정조(재위: 1777~1800) 14년(1790)증광시 생원급제 이후 성균관 유생으로서 科文에 小品體를 구사하였다. 이 일로 그는 국왕 正祖에게 ‘文體反正’과 관련된 요주의 인물로 지목되었고, 급기야 군에 편적되어 유배까지 갔다.
실록에 따르면 1792년에 이옥은 성균관 유생으로 지내면서 應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