斯文亂賊)을 주자학파의 폐단으로 지적하며, 주자학이 경직되면서 현실 변화에 적극 대처하는 활발한 사상으로 거듭나지 못했다고 비판하였다. 또한 사문난적이란 이름으로 사상을 속박하고 언론을 억제하는 학문 풍토로 인하여 세상의 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처할 수 없었기 때문에 우리 민족이 서양
斯文亂賊]이라 탄압하였다. 그런 까닭에 육왕계의 성리학에 호감을 가진 학자들이 간혹 있었지만, 적극적으로 체계 있게 연구하지 못했고 그나마 그 연구를 세상에 드러내지 못했다. 이러한 상황이었던 만큼 심학자다운 심학자로서는 겨우 18세기 초에 鄭齊斗 하나를 배출했을 뿐이다. 19세기 말엽에 와
斯文亂賊)’이라는 지탄을 받고 또한 모역에 가담하였다는 죄명을 쓰고 죽음을 당한 학자이다. 윤휴는 주자학의 관념론적 사고방식을 비판하면서 17세기 조선 사회에서 절실히 요구되는 실천적 학문 자세를 지닐 것을 주장하였다. 하지만 ‘반주자학(反周子學)’ 혹은 ‘탈주자학(脫周子學)’의 인물
서론
목민심서(牧民心書)는 경세유표(經世遺表), 흠흠신서(欽欽新書)와 더불어 ‘1표(表) 2서(書)’라고 불리는 다산(茶山) 정약용(丁若 鏞, 1762∼18의 대표적 저서이다. 다산은 과거 급제 후 중앙정계에서 정사(政事)를 돌보았고 지방 관리로서 근무하는 등 여러 공직을 거쳤다. 뿐만 아니라 18년간의 유
서론
다산은 목민심서 서문에서 “군자의 학문은 ‘수신(修身)’이 그 절반에 해당하고, 나머지 절반은 ‘목민(牧民)’이다”라고 했다. ‘목민’이란 말은 원래 중국의 고전 관자(管子) 제1편 「목민」에 서 유래했다. 목민이란 ‘백성을 다스리는 것’을 의미한다. 목민(牧 民)에서 목(牧)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