朔州龜城調 朔州龜城調(삭주구성조)-삭주구성은 평안도에 있는 김소월의 고향.
는 지금 읽 어도 좋으니 목월이 못지않어 아기자기 섬세한 맛이 좋다. 민요조에서 시에 進展하기까지 목월의 고심이 더 크다.” 정지용,「시선집」(<문장>, 1940. 9), p.94.
정지용은 추천사에서 이상과 같이 말하여 목월의 시
朔州=오희순)의 계속적인 도움으로 이듬해에 재기하였다.
1898 (35세) : 청일전쟁(淸日戰爭)후 5년만에 그는 벌써 평양에 큰 상사를 다시 개설하고 납청정(納淸亭)과 진남포(鎭南浦) 등에 지점을 두었으며, 서울과 인천을 통하여 외국과 거래하여 국제 무역상으로 자리를 굳혔다. 南岡은경인선(京仁線)을
朔州) 대관보통학교를 졸업한 뒤 아버지 장석인이 교사로 근무하던 평양부 숭실중학교에 재학하였다.
1944년 일제 강점기 당시 그는 일제에 의해 강제징집된 것으로 알려졌었다. 그러나 고향 친구 최기일은 자원 입대라고 진술하였다.
최기일은 장준하의일군입대를 열심히 만류하였으나 그는 듣지 않고
朔州龜城調는 지금 읽어도 좋더니, 목월이 못지 않아 아기자기 섬세한 맛이 좋다. 民謠調에서 시에 發展하기까지는 목월의 苦心이 더 크다.」
을 받아 성인 시인으로 등단된다. 일제 말기에 이르러 1941년에 『문장』,『인문평론』이 폐간되고, 1941년 12월에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자, 시 발표는 중단되고
朔州龜城〉·〈가는 길〉·〈산 山〉, [배재] 2호에 실린 〈접동〉, [신천지 新天地]의 〈왕십리 往十里〉 등이 있다. 1924년 [영대(靈臺)] 동인으로 활동하며 문우(文友) 나도향(羅稻香), 스승 김억(金億)등과 교류하며 [영대]에 〈밭고랑 위에서〉(1924)·〈꽃촉(燭)불 켜는 밤〉(1925)·〈무신 無信〉(1925) 등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