木簡)의 기록, 직물에 쓴 포기(布記), 고분의 벽에 붓글씨로 기록한 묵서명(墨書銘), 칠기(漆器)에 기록한 묵서, 기와나 전돌의 명문(銘文) 등을 포괄하여 부르기도 한다. 이는 넓은 의미의 금석문이라 할 수 있다. 역사학의 기본 자료는 종이로 만든 서책(書冊)에 기록한 문헌자료이다. 넓은 의미의 금석
木簡儀)였다. 나무 간의로 천문 관측을 해 보고 자신을 얻은 이들 학자들은 이어서 청동제의 간의를 크게 만들어 경복궁 경회루 연못 북쪽에 높은 대를 세워 그 위에 설치해 놓았다. 많은 엿 기록이 그렇듯 세종대왕 때의 간의가 얼마나 컸는지는 지금 알 길이 없다. 그것은 얼마 견디지 못하고 사라졌던
木簡儀)를 만들고 이어 청동으로 만들었다. 이것은 세종 이후 조선 천문학의 가장 기본적 천문 기구이다. 이때부터 물을 동력으로 이용한 수격식(水激式) 동력의 천문 시계가 천문·역법 관측의 표준 시계로서의 구실을 했다. 그 후 혼천의는 수리되기도 하고 또 새것으로 만들어지기도 했으나 임진왜란
木簡:글을 적은 나뭇조각) 50쪽을 만들어 물에 넣고 제비를 뽑으니 거타지라 쓴 목간이 물에 잠기었으므로 거타지만을 남기고 모두 떠났다.
신라 51대 진성여왕(眞聖女王, ?~897, 재위 887~897)의 막내아들 양패 일행이 지금의 백령도인 곡도에서 풍랑을 만난다. 곳곳에 도둑이 들끓는다는 것으로 보아 신라
나타나 “활을 잘 쏘는 사람 하나만 이 섬에 남겨 두고 떠나면 순풍을 얻으리라.” 하였다.
양패가 (2)섬에 남을 자를 가리기 위하여 각자의 이름을 적은 목간(木簡:글을 적은 나뭇조각) 50쪽을 만들어 물에 넣고 제비를 뽑으니 거타지라 쓴 목간이 물에 잠기었으므로 거타지만을 남기고 모두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