梁啓超) 등의 도움을 받아 1892년부터 ≪공자개제고(孔子改制考)≫를 편찬하기 시작하여 1898년에 간행하였다. 여기에서 그는 공자를 혁신의 선구자로 삼고, 공자가 ≪육경(六經)≫을 지은 목적은 요순(堯舜)과 같은 고대 성군의 말을 빌려 당시의 사회를 개혁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주장하였다. 즉 그는
보호 육성되었으나, 곧 그 비실천성에 대한 비판은, 도광제(道光帝) 이후 청왕조의 쇠퇴와 중국 전체의 위기 가운데서 공양학(公羊學)의 발흥으로 나타났으며 그것은 공자진(自珍) 위원(魏源) 캉유웨이[康有爲] 량치차오[梁啓超]로 이어지면서, 드디어 변법자강의 실제운동을 불러일으키기에 이르렀다.
梁啓超]로 이어지면서, 드디어 변법자강의 실제운동을 불러일으키기에 이르렀다. 한편 고문학파(古文學派)에서도 실천성을 강조하는 증국번(曾國藩)·장즈둥[張之洞] 등이 나타나서 송학(宋學)을 재흥시켰다. 그들을 중심으로 하여 수행된 양무운동 사상은 ‘중체서용론(中體西用論)’으로 특징지어지
梁啓超]로 이어지면서, 드디어 변법자강의 실제운동을 불러일으키기에 이르렀다. 한편 고문학파(古文學派)에서도 실천성을 강조하는 증국번(曾國藩)장즈둥[張之洞] 등이 나타나서 송학(宋學)을 재흥시켰다. 그들을 중심으로 하여 수행된 양무운동 사상은 중체서용론(中體西用論)으로 특징지어지는데,
梁啓超)의 〈음빙실문집 飮氷室文集〉 등을 접하면서 근대사상을 다양하게 수용했으며, 1908년 일본 각지를 돌아다니며 견문을 넓혔다. 이러한 다양한 경험이 그의 사상 형성에 큰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1911년 송광사에서 박한영·진진응·김종래 등과 승려궐기대회를 개최하여 일본의 조동종(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