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아산(牙山)까지 점령하였다. 이어 이들은 청주목(淸州牧)의 치소(治所)를 제외한 관할구역 내의 모든 군현(郡縣)을 점령하였다. 그러나 관군이 전면적인 토벌작전을 벌이자 차차 기세를 잃고, 7월에 망이 망소이 등이 붙잡힘으로써 망이 망소이의 난은 끝났다.
▶충주 다인철소의 몽고군 격퇴
治所)로서 동북변방(東北邊方)의 정치,군사상의 요지가 되었다.
938년 요 태조 야율아보기는 한족의 도시를 모방하여 상경 임황부(上京臨況府 : 지금의 내몽고 파림좌기 남쪽), 중경 대정부(中京大定府 : 지금의 내몽고 영성 서쪽), 동경 요양부(東京遼陽府 : 지금의 요녕성 요양), 남경 유주부(南京幽州府
治所)인 조선현의 위치는 평양 일대라는 견해이다. 이 견해도 앞의 두 견해와 마찬가지로 고고학적 연구성과에 크게 의존하고 있다. 비파형동검 문화가 랴오닝 성 일대를 중심으로 분포하고 있는 것에 비해 그 후신이라고 볼 수 있는 세형동검의 중심지는 평양을 중심으로 한 한반도 서북지방이라는 점
治所)로서 동북변방(東北邊方)의 정치·군사상의 요지가 되었다. 2차에 걸쳐 실패를 거듭한 한민족(漢民族)의 고구려(高句麗) 침략, 즉 수양제(隋煬帝)와 당태종(唐太宗)의 고구려 원정 때에는 다같이 계성( 城)을 그 원정의 전진기지로 삼았고, 당태종은 고구려에 패한 뒤 전몰장사(戰歿將士)의 넋을 애
治所(치소)가 되었다. 이 같은 사실은 斯盧國(사로국)이 六村(대촌)으로 구성되고 駕洛國(가락국)이 九村(구촌)으로 구성된 데서 입증이 된다.
소국을 구성한 읍락들은
其俗重山川(기속중산천) 山川各有部分(산천각유부분) 不得妄相涉入(부득망상섭입)
에서 보듯이 배타적 속성이 강하였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