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천량전투의 지휘관 원균
▪ 1592년(선조 25) 경상우수사
▪ 1597년 1월에 경상우수사
겸 경상도통제사로 임명되어
삼도 수군을 통솔
▪ 칠천량해전(漆川梁海戰)에서
대패 후 전사
▪ 1604년 이순신·권율(權慄)과 함께
선무공신(宣武功臣)1등으로 책록됨
▪ 조선 수군은 거
海戰)에서부터 거북선을 본격적으로 사용하였다.
1592년 7월 7일에는 한산도 앞바다에서 조선 수군이 일본 수군을 크게 무찔렀는데, 이것이 한산도대첩(閑山島大捷)이다.
임진왜란 전개 과정
이 전투에서 원균은 전라우도 수군절도사 이억기(李億祺), 충청수사 최호(崔湖) 등과 함께 전사하
海戰)에서 카르타고 해군에게 대승을 거두었으며, BC 256년 로마는 대함대를 거느리고 아프리카로 원정하였으나 크게 패하였다. 전장은 다시 시칠리아 서부로 옮겨져 시칠리아 서단(西端) 아이가테스해전에서 승리하여 카르타고를 무조건 항복시켰다. 이 전쟁의 결과로 로마는 거액의 배상금을 얻는 한
海戰) 또는 명량 대첩(鳴梁大捷)은 1597년(선조 30년) 음력 9월 16일(양력 10월 25일) 정유재란 때 조선 수군 13척이 명량에서 일본 수군 133척을 쳐부순 해전이다. 이른 바 울목도 해전이라 불리는 이 승리는 워낙에 말도 안 되는 대승을 거두었고, 그 이면에는 여러 가지 분석. 이를테면 학익진과 판옥선단, 거
海戰)에는 약한 것을 노린것이기도 하다.
이렇게 몽고의 침입으로 천도까지 감행하였지만 끝내 버티지 못하고 고려는 결국 원에 강화조약을 맺고 만다. 그러나 삼별초만이 끝까지 항전의 의지를 불태우고 분연히 일어난다.
삼별초(三別抄)는 정규군이 아니었다. 사병적인 성격이 강하였고 굳이 분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