滿蒙日報)》 고문으로 있다가 1939년 일본 관동군이 세운 건국대학(建國大學) 교수가 되었고, 귀국 후 1943년 재일조선인 유학생의 학병지원을 권고하는 강연을 하기 위하여 도쿄로 건너갔다. 광복 후 우이동(牛耳洞)에 은거, 역사논문 집필에 전념하다가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기소되어 1949년 수감되었으
滿蒙日報)』고문과 건국대학(建國大學) 교수를 역임하고 1943년에는 재일조선인 유학생의 학병지원을 권고차 도일했다. 불함문화론이란 1927년 ≪조선급조선민족≫경성, 조선사상통신사 제1집에 일문으로 발표한 논문이다.
1918년에 쓴 그의 상고사 연구 [계고차존]은 한국의 전통적·고전적인 고대사관
滿蒙)의 봉금지(封禁地)를 잠식하고, 또는 해외로 이민하여 화교(華僑)가 되거나 혹은 비밀결사에 들어가 반사회적 행동을 하였는데, 그 일부는 백련교의 난을 비롯한 청나라 말의 여러 반란에서 일정한 혁명적 역할을 수행하였다. 청왕조는 처음에 엄하게 해금(海禁)하여 외국무역은 광저우[廣州]항 한
기업은 현재의 일본 실업자를 구하고 불황을 타개할 수 있다”는 경제적 이익도 제시하였다(이리에 1993, 110). 이러한 군부엘리트들의 만몽론(滿蒙論)은 만몽지역이 일본의 국운과 발전을 위해서 가장 중요한 거점이기 때문에 만몽에 대한 절대적인 지배권를 확보하여야 한다는 것이 주된 내용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