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고조는 중국을 다스림에 문사(文事)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학문을 크게 장려하였다. 그런데 진화의 액[秦火之厄]과 항우의 병선[項羽之兵]을 겪으면서 많은 중요한 전적(典籍)들이 사방으로 산실되었다. 이로 말미암아 이 당시의 학자들은 선진제가들의 학설을 수집하는 데 모든 노력을 기울였고, 철
王充의 철학적 논점의 차이를 살펴보는 것을 목적으로 하겠다. 董仲舒의 철학사상이 天人合一을 대표한다면 王充은 天人分二를 대표한다 할 수 있을 것이다. 두 철학자는 활동했던 시기가 다르므로동중서는 한초 무제 시기에 활약했던 인물이다. 대략 기원전 179-104년으로 추정되고 있다. 왕충은 후한
王充)의 성론과 대립되고, 선악의 상대적 전환가능성이 있는 순자(荀子)의 이른바 성악설(性惡說)과도 크게 다르다. 그 후 유교는 성선설을 도덕실천의 근거로 하여 계승되고 발전하였다.
● 성악설 [性惡說]
고대 중국의 유학자 순자(荀子)가 주창한 학설로서 사람의 타고난 본성은 악이라고 생각하는
王充), 성정상응설(性情相應說, 荀悅), 성선정악설(性善情惡說) 등이 나타났고, 또한 성을 종류별로 나누는 성삼품설(性三品說, 文中子韓愈), 내용에 따라 분류하는 본연기질설(本然氣質說, 張載)성기일원설(性氣一元說, 程顥)성정일원설(性情一元說, 王安石) 등이 주장되었다
한대(漢代:BC 202~AD 220)에
王充)의 성론과 대립되고, 선악의 상대적 전환가능성이 있는 순자(荀子)의 이른바 성악설(性惡說)과도 크게 다르다. 그 후 유교는 성선설을 도덕실천의 근거로 하여 계승되고 발전하였다.
서양에서는 성선설이 소수의 철학자와 교육자 사이에 유행되었을 뿐이다. 스토아 학파는 인성(人性), 물성(物性)