王思想)과 직결되는 것이었다. 당시 불교계에서는 부모군사시주(父母君師施主)에 대한 사은(四恩)이 강조되고 있었다. 불교계는 충군적(忠君的) 입장을 견지함으로써 조선왕조의 불교배척에도 불구하고 왕실과 끊임없는 화해를 시도하고 있었다. 또한, 불교계는 임진왜란 이후 호국사상에 입각한 의승
관사와 역사야사는 상호 교감해 비추어 보면 같지만 다른 것도 있고, 다르나 같은 것도 있고 저것은 자세하고 이것은 생략하고 이는 꺼리는 말이나 저들은 실제 서술해 시비와 진위의 감별은 더욱 역사를 보는 사람이 마음을 다해 비춰봄에 의뢰하니 진실로 쓸모있는 일로 보면 일일이 분명하게 변별하
却說唐主李嗣源, 寵任樞密使安重誨, 連他矯制與否, 亦未嘗過問。
각설당주이사원 총임추밀사안중회 연타교제여부 역미상과문
각설하고 당나라 군주인 이사원은 추밀사인 안중회를 총애하고 임명해 그가 어제를 고친 여부는 또한 아직 일찍이 문책하지 않았다.
重誨?殺任?, ?行奏聞, 唐主反詔數?罪,