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격동의 19세기, 박은식(朴殷植)과 신채호(申采浩)의 성장과 시대배경
백암(白巖) 박은식(1859~1925)과 단재(丹齋) 신채호(1880~1936)는 민족주의 사관의 선구자로 일컬어진다. 이들은 1900년대 초에 황성신문(皇城新聞),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新報) 등의 언론기관에서 종사하며 일제의 침략 아래 식민
申采浩(1880~1936)는 근대민족주의사학을 성립시킨 인물로 알려져 있다. 단재는 1880년 12월 8일 충청도 회덕현 산내면 어남리 도리미 마을에서 빈농이었던 아버지 신광식과 어머니 반남 박씨 사이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신채호는 대략 여섯 살 이전에 태어난 곳을 떠나 지금의 충북 청주시 상당구 낭
신채호(이하 단재)의 역사학은, 역사관․역사연구 방법론에서 이미 근대 사학의 수준에 도달하였고, 사학 정신이나 그 지향점 또한 근대 민족주의 사학의 결실이었고, 단재에 이르러서 근대 민족주의 사학이 성립되었다고 할 수 있다. 우선 그의 역사관은 한국사 인식체계와 역사 무대의 확대라는
신채호사학은 박은식 사학과 함께 한국사학을 근대적인 학문으로 성립시키는 데 큰공을 세웠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신채호와 박은식의 역사학은 민족주의사관에 입각하였다는 점과 역사학방법론을 수용하여 한국사학을 근대적인 학문으로 성립시키려 노력하였다는 점에서 공통되지만 양자간에는
1910~1920년대의 조선에서는 일제의 식민통치로 인해 우리 민족의 말은 물론 우리 민족의 역사를 배우고 가르치는 것도 거의 불가능했다. 게다가 대한제국 시기의 사서 또한 이미 식민사학에 오염되어 있었기에 이 시기에는 개인의 역사의식과 역사를 알고자 하는 지적 호기심마저도 일제의 식민사학(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