皇帝權과 敎皇權의 마찰은 11~13세기에 그 극에 이르렀다. 황제와 교황의 대립으로 皇帝權은 약화되어 갔고 제국내의 諸侯들의 세력이 커짐에 따라 중앙집권적인 國王的 국가조직은 封建的인 諸侯制的 國家形態로 변모되어 갔다. 마침내 프리드리히2세가 사망(1250년)한 다음 帝國思想(Reichsgedanke)은 쇠
皇帝權 强化를 이룩시키기 위한 武帝의 政治的 戰術이었음이 自明하다.
武帝는 또한 以前의 功臣集團을 대체할 새로운 官僚階層을 育成하기 위해 ‘選擧制度’를 確立, 새로운 人物들을 대거 起用하였다. 이로 인해 地方의 下級官吏가 대거 中央으로 進出하였으며, 實務能力을 갖춘 官僚集團은 武帝
皇帝權이 약화됨에 따라서 그들을 모집한 高官이나 將軍의 私兵으로 編入되었다. 또 募兵은 본래 良民 중에 생활이 困窮하여 응모한 者들이므로 家族과 함께 高官이나 將軍에게 隸屬당하는 隸民으로 轉落하였다.
北魏는 화북지방을 정복하는 과정에서 軍事的으로 중요한 지역에 軍鎭을 설치하고
Ⅰ 北魏의 華北統一 과정
北魏보다 먼저 華北 지역에서 주도권을 잡았던 前秦은 淝水의 戰鬪에서 南朝에 패하며 그 세력이 와해된 상황이었고, 북쪽은 다시 혼란에 빠져 여러 정권들이 할거하게 되었다. 관동 지구에는 後燕과 西燕, 南燕, 北燕이 차례로 출현하였고, 관중 지구에는 後秦과 大夏 등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