科文)도 따로 공부해야 하였다.
과거 합격은 가문뿐 아니라 고을의 경사일 만큼 어렵고 대단한 일이었다. 더욱이 시간이 지날수록 경쟁률은 치열해지고 그만큼 합격에 걸리는 시간도 길어졌다. 실제 대부분의 양반은 응시와 낙방을 반복하다가 40~50대에 이르러 과거 응시를 포기하게 된다. 조부님 또
科文에까지 패관소품의 문체가 침투하여 경전이 무의미한 것으로 전락하고 있음을 지적한다. 그는 문체 변화의 근거를 제공한 것은 중국서적이니 박종악에게 稗官小記는 물론 경전과 역사서라도 중국판은 절대로 수입하지 말 것, 귀국때 철저히 수색해 교서관에서 압수하여 유포시키지 말 것을 지시
科文) 등을 익혔다. 17세때 우리나라 마지막 과거인 경시(慶試)에 응시하기 위해 해주에 갔으나, 매관매직의 참상을 보고 실망하여 과거를 포기하고 돌아와 풍수지리서관상학병서 등을 읽으며 훈장을 지냈다.
나. 국내에서의 항일 구국운동
백범이 과거에 낙방한 뒤 실의와 좌절 속에서 병서를 읽으며
이옥(1760-1815)은 정조(재위: 1777~1800) 14년(1790)증광시 생원급제 이후 성균관 유생으로서 科文에 小品體를 구사하였다. 이 일로 그는 국왕 正祖에게 ‘文體反正’과 관련된 요주의 인물로 지목되었고, 급기야 군에 편적되어 유배까지 갔다.
실록에 따르면 1792년에 이옥은 성균관 유생으로 지내면서 應製
나는 후대 대한민국 인천에 사는 조선 사람으로 성씨는 인천 李(이)가로 그 이름이 建宇(건우)이다. 지금부터 16세기 조선 양반으로서 나의 일생을 그리려 하며 나의 출생배경과 입신, 출가, 양반으로서 성가(成家)에 대해 자세하게 알리려고 한다.
“인천 이씨(李氏)의 기원은 김해 허씨(金海 許氏)와 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