程朱學)의 창시자로 알려졌다. 철종(哲宗) 초에 사마광(司馬光)여공저(呂公著) 등의 추천으로 국자감 교수가 되었고, 이어서 비서성 교서랑(校書郞)숭정전설서(崇政殿說書)로 발탁되었다. 그러나 왕안석(王安石)소식(蘇軾) 등과 뜻이 맞지 않았고, 당화(黨禍)를 입어 쓰촨성[四川省] 푸저우[州]로 귀양간
양명학 - 하곡 정제두
양명학의 사상적 구조
토지 겸병의 심화로 인한 농민 봉기, 환관에 의한 전제 정치, 황실과 번왕(藩王) 간의 충돌 등 명대(明代) 중기의 제반 사회적 위기들은 당시 관학(官學)인 정주학(程朱學)이 이미 그 규제력을 잃었음을 드러낸 것이다. 정주학이 당시의 위기를 극복하는 데 무
성리학의 발전
1. 성리학
Ⅰ 성리학
‘성리학性理學’이란 중국 송대에 성립된 유학의 새로운 경향이다. 그 대표적인 학자들이 북송의 이정 형제와 이를 계승한 남송의 주희朱熹였기에 ‘정주학程朱學’ 또는 ‘주자학朱子學’이라 부르기도 하고, 그들 학문의 성격을 드러내어 ‘리학理學’ ‘도학
程朱學)의 창시자로 알려졌다. 『역경』(易經)에 대한 연구가 깊었고,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의 철학을 수립하였으며, 그의 철학은 주자(朱子, 1130~1200)에게 계승되었다. 저서로는 『역전』(易傳) 4권이 전해진다.
의 “자신을 잊고 욕심을 따르는 것을 심한 부끄러움으로 여긴다.”라는 말을 얻어
程朱學) 중심에서 지행합일(知行合一)을 강조하는 양명학(陽明學)으로 변하였다. 이러한 사상적 변화를 바탕으로 교육·언론가 또는 민족운동가로 활동하기 시작하였다.
1898년 9월 장지연이 창간한 《황성신문》의 주필로 민중계몽에 나섰고, 만민공동회와 더불어 반봉건·반침략 투쟁을 벌이던 독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