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들어가며
한국 고대사연구에 있어 기자조선은 늘 문제아였다. 그 동안 古朝鮮에 관한 많은 연구와 업적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衛滿朝鮮에 비하여 箕子朝鮮設에 관한 명확한 결론이나 학설은 내려지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헌사료와 발해연안에 보이는 청동기 禮器에 보이는 ‘箕侯’를
箕子의 王朝鮮’을 기재하였으나, 箕子는 箕子 자신이 王됨이 아니요, 기원전 323년경에 이르러 그 자손이 비로소 「불朝鮮王」이 되었나니, …이제 史實을 따라 箕子朝鮮을 削하노라.” - 신채호, 조선상고사
하고 있는데 이후의 많은 주장들이 신채호의 논리에 따라 기자 조선을
箕子)가 조선에 와서 단군조선에 이어 건국하였다고 전하는 나라이다. 따라서 고조선은 중국의 은, 상 왕조의 후예들이 한반도에 건립한 자신들의 지방정권이라 주장하는 것이다.
이에 대해 조범종, 우석대 교수는 이렇게 반박한다.
기자조선 관련 사료는 신빙성이 없어 학계에서 역사로 인정하지
箕子所封之地. 其民習於禮讓知尊君親上之義. 作此歌. 言仁恩充暢以及草木雖折敗之柳亦有生意也.『북역 고려사』제6책, 신서원, 1966, p.497
3) 이해 : 고려사(高麗史) 악지(樂志)에는 <서경(평양)>으로, <동국문헌비고(東國文獻備考)>에는 서경곡(西京曲)으로 각각 제목과 유래만 실려 있고, 가사는 전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