蓋鹵王)을 패사(敗死)시켜 고국원왕(故國原王)의 한을 풀고 아산만(牙山灣)까지 진출, 한강 유역을 지배하였다. 이때 백제는 수도를 웅진(熊津:공주)으로 옮기고, 고구려의 공격을 받은 신라는 죽령(竹嶺) 이북의 땅을 잃었다.
장수왕의 뒤를 이은 문자명왕(文咨明王)은 494년 부여(夫餘)를 복속시켜 고구
蓋鹵王:재위 455∼475) 때 고구려의 간첩승(間諜僧) 도림(道琳)이 개로왕과 바둑을 두며, 국사를 돌보지 않게 하여 백제를 망쳤다고 한다. 신라는 738년(효성왕 2)에 형도(刑璹)가 당(唐)에서 바둑을 들여왔다고 한다. 그 후 투호(投壺:화살을 병 속에 던져 넣는 놀이), 상희(象戱:장기의 전신) 등이 당나라에
王) 63년(475)에 고구려의 차지가 되어 장수왕이 한성백제를 공격한 뒤 개로왕(蓋鹵王)이 이 성에서 살해당한다. 고구려는 아차산에 보루(堡壘) 적의 침입을 막기 위하여 돌 따위로 튼튼하게 쌓은 구축물.
들을 설치하고 한강유역을 점령하였다. 아차산성을 비롯한 한강유역일대는 고구려가 차지했다가
王) 63년(475)에 고구려의 차지가 되어 장수왕이 한성백제를 공격한 뒤 개로왕(蓋鹵王)이 이 성에서 살해당한다. 고구려가 차지했다가 진흥왕(眞興王)대에 신라 수중에 들어갔다. 그 후 신라와 고구려의 한강유역 쟁탈전 때 삼국시대의 중요한 요새였다. 아차산성은 한강유역을 둘러싼 삼국의 각축양상을
맞지 않는다. 日本書紀가 三國遺事와 연대가 맞아 떨어지는 시기는 백제 개로왕(蓋鹵王)21년(서기 475년)부터이다. 475년 이전의 기록은 120년씩 차이가 나는 것이 가장 많다. 대개 옛날에는 간지(干支)로 기록되는 경우가 많은데 간지의 기록을 日本書紀를 편찬할 때 二週甲씩 올려서 기록한 결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