府使)라는 외적으로 밀려났다. 1798년 내직으로 들어오게 되었지만 1800년 정조(正祖)가 사망하고 순조(純祖)가 즉위 곧 그 일파와 함께 신서파(信西派)로서 지목되어 박해를 받다가 1801년 다른 자들과 함께 투옥되어 그는 경상도 장기(張기)로 유배되었고 이어서 전라도 강진(康津)으로 옮겨져서 이후 오
1. 양동의 역사
1) 마을내력과 전설
*마을내력
동천리는 예종(睿宗)때에 양천리(梁川里)라 하던 곳이다. 정조(正組)때는 양천(良川)이라 하다가 고종(高宗) 1년(1864)년에는 양천과 양동(良東)으로 갈라지고 고종 31년(1894)에도 역시 두 마을로 있었다. 양동마을은 양천리에서 서기 1864년에 양천과 양동으로
慶尙道의 성립
『慶尙道地理志』에 의하면 “고려 태조가 三韓을 통합하고 비로소 東南海道部署使를 두었다고 하였으며, 그 후에 慶尙晋安東道, 慶尙州道, 慶尙道 등으로 각각 고쳤으나 그 개칭의 연대는 미상이다”고 하였다. 그 개칭의 연대에 관해서 『世宗實錄』地理志에서는 대략 아래와 같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