處士)적 위상을 갖고 있던 인물들은 북벌(北伐)론의 비현실성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대부분의 인물들은 북벌론의 의미와 효종의 정신을 기념하면서 북벌론을 역사화하고 있었다. 이 시기에는 북벌론에 대한 비판적이고 부정적인 인식이 전대에 비해 점점 더 확산되고 있었다. 명나라에 대한 은혜
處士歌)>, <태부가(怠婦歌)> 등의 노래가 더 있었다는 동학의 기록을 들어 이와 같은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이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먼저 <<용담유사>>와 관련된 동학의 기록을 보면 다음과 같다.
거의 일 년 가까이 수련을 하니 자연 아님이 없다. 이에 <용담가>를 짓고 또 <처사가>를 짓고 <교훈가>, <안
處士 또는 學生」이라 쓴다. 부인에게도 봉호(封號)가 있으면 봉호를 쓰고 봉호가 없을 때는 「孺人某貫某氏(例-孺人淸州韓氏)」라 쓴다. 18세 미만에 죽은 자식은 「亡子秀才(士)」라 쓰고 남편은 「顯(현벽)」이라 쓰며 백중숙부모(伯仲叔父母)에게는 「伯仲叔父母 또는 伯仲叔考」라고 쓴다. 또 지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