許穆의 『眉記言』
安鼎福의 『東史綱目』
李肯翊의 『燃藜室記述』
李裕元의 『林下筆記 』
청나라의 『皇朝文獻通考』
처용을 소개하는 문헌들
처용은 헌강왕 때에 비롯되었다
2. 처용설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처용설화
◎ <삼국사기>의 처용
5년 3월에 왕은 나라의 동쪽 지방의 주 군에 행차
許穆: 1595~1682)과 노론의 영수인 송시열(宋時烈: 1607~1689)
① 효종의 뜻하지 않은 죽음 → 상복을 입는 기한을 놓고 논쟁
효종이 맏아들이 아니라 소현 세자의 뒤를 이었고 당시의 대비가 생모가 아니었기 때문에 장례 법도를 정하는 데에 논란의 소지가 많았다. (서로의 명분을 앞세워 당쟁에서 유리한
許穆)으로부터 정약용(鄭若鏞)까지의 남인들은 성리학의 절대적인 권위를 비판하는 간접적인 방법을 원시유학 재홍에서 차증려 했다. 경학(經學)에 대한 논의를 새롭게 하면서 주자(朱自)의 경전 해석이 상대적인 의의박에 업다고 하는 것이 그렇게 하는 구체적인 방법이었다. <시경>(詩經)에 대한 재해
許穆), 유형원(柳馨遠) 등의 학문경향에 커다란 영향을 받아 혁신적인 학문체계를 이룩하였다.
(經世致用派)인 성호학파를 형성케 하는 등 우리나라 사상사에 큰 영향을 주었다.
이익선생의 주요저서로는 천문, 지리, 역사 등을 망라하여 백과전서적으로 저술한 『성호사설』, 실학사상의 구체적 내용
許穆)으로부터 정약용(鄭若鏞)에 이르기까지 계속 나타났다. 이 경우에는 한층 더 복고적이라는 인상을 주지만, 선행하는 권위를 가져와서 후대에 형성된 질곡을 타파하자는 것이 숨은 의도였기에 단순하지 않은 논리와 힘든 고증을 거쳐서 정통 한문학을 쇄신하여 현실에서의 문제의식을 가다듬자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