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명학의 수용 - 정제두의 사상
1. 하곡 정제두가 누구인가?
하곡(霞谷) 정제두(鄭齊斗)는 1649년(인조 27)∼1736년(영조 12) 살았던 인물이다. 조선 유일의 양명학자로 지칭되어지는 만큼 한국 양명학에 있어서 그가 끼친 영향은 실로 지대하다. 당시의 도학은 정통주의적 신념에서 양명학을 이단으로 배척
鄭齊斗)가 대표적인 양명학자다.
임진년 일본이 침략하였을 때, 최초의 양명학자 남언경은 의병을 일으켰다가 진중(陣中)에서 병사하였고, 이요 역시 의병에 종사했다. 尹南漢, 『조선시대의 양명학 연구』(집문당, 1982년), 195~196쪽.
이들 양명학자로부터 실천을 중시하는 행동하는 지성인의 삶을 엿볼
. 하지만 남언경(南彦經)이요(李瑤)장유(張維)최명길(崔鳴吉) 등에 의하여 수용(受容)되어 정제두(鄭齊斗)에 의하여 양명학파가 수립되었다. 그로부터 이종휘(李鍾徽)이광사(李匡師)이충익(李忠翊)정동유(鄭東愈)이건창(李建昌)이건방(李建芳)박은식(朴殷植)정인보(鄭寅普) 등으로 계승발전되었다.
鄭齊斗) 조선의 양명학자. 자는 사앙(士仰), 호는 하곡(霞谷). 조선조 후반기에 접어들면서 일부 실천적인 학자들은 주자학적 관념론에 대하여 회의를 느끼고, 당시 중국에서 자유주의적 기풍을 강하게 풍기고 있던 양명학, 그 중에서도 특히 신흥 상공업자의 입장을 대변한 양명좌파(陽明左派)의 사상
鄭齊斗 하나를 배출했을 뿐이다. 19세기 말엽에 와서야 朴殷植 등에 의하여 심학에 대한 관심이 새로워지는 형편이다. 그러므로 중국이나 일본과 달리 거의 [程朱學 절대 우위의 성리학]의 전개를 본 이것이 한국 성리학의 첫 번째 특징이다.
2. 主知主義 특징
정주학과 육왕학과의 차이는 대체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