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시정부의 김구는 김학무를 통해서 연안 독립동맹의 김두봉에게 ‘連絡과 統一’을 위해 자신이 연안을 방문할 의사를 피력한 편지를 보냈다(d, h). 10월초(d) 김구의 편지를 받은 김두봉은, 그 달 16일 연안측이 민족적 입장에서 사소한 의견을 버리고 김구의 연안행을 환영한다는 답신(a)과 전문(c, e)을
Ⅰ. 서 론
옛 부터 초강대국인 중국은 우리나라와 떨어질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가 되었다. 최근의 사드문제로 인하여 양국간의 갈등도 있지만 잘 해결될 것으로 믿는다. 옛날부터 우리나라와 교류가 있어왔기 때문에 우리의 역사적 흐름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이러한 영향은 우리 선조들의 생활양
Ⅰ. 서론
김구와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들이 통일운동을 적극적으로 추진하는 것은 1948년 1월 이후이다. 그러나 그것은 또한 그 이전 역사의 산물이었으니, 여기서는 우익 민족주의자들이 주도한 통일운동의 배경과 원인을 살펴보고자 한다.
먼저 검토할 것은 우익진영 자체의 동향이다. 해방 직후
임시정부와 광복군을 지원하는 국민당정부를 의식하고 조선독립동맹과 조선의용군을 나름대로 후원했으며, 이들에 대한 포섭과 사상공작에도 적지 않은 노력을 기울였다.
당시 중국공산당 막후 실력자의 한사람으로 제2차 국공합작 이후 중경에 파견되었던 주은래는 “중국과 한국관계는 장차 확실
1. 백범 김구의 생애
백범은 15세에 한학자 정문재에게서 한학을 배웠고, 1893년(고종 30년) 동학에 입교하여 접주(교구 또는 포교소의 책임자. 포주 또는 장주라고도 함)가 되고 1894년 팔봉도 소접주가 되어 동학혁명군에 가담하여 싸웠으나 청나라와 일본의 개입으로 패배하였다. 동학혁명군이 패배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