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지고 가는 것이었다.
(경복궁의 역사)
경복궁은 1963년 1월 21일 사적 제117호로 지정되었다. 역성혁명(易姓革命)으로 조선을 세운 이성계(李成桂)와 그 지지자들은 고려의 서울인 개경(開京)으로부터 도읍을 한양성(漢陽城)으로 옮겨 신도(新都) 경영에 착수하는 동시에 궁궐의 조성도 착수하였다
왕실의 권위를 회복할 겨를도 없이 묘청(妙淸)의 난이 일어남으로써 왕권은 더욱 쇠약해졌다. 묘청의 난 진압에 따르는 서경세력(西京勢力)의 몰락은 개경(開京)에 기반 을 둔 문신세력(文臣勢力)을 득세하게 하였고, 서경세력의 몰락은 고려왕실의 유력한 세력기반의 상실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開京, 송악(松嶽), 지금의 개성)과 서경(西京, 지금의 평양)이 명당이라는 설이 널리 유행하였다.
훗날 묘청(妙淸)은 이러한 풍수도참사상을 기반으로 서경천도운동을 일으켰다. 묘청은 서경으로 도읍을 옮겨야 나라가 발전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는 왕권과 사회질서를 흔들고 있던 기존 귀족 세력들
開京)에 사신을 보내 칭기즈칸의 조서(詔書)를 전하고 정식으로 수호(修好)를 청하였는데 이것이 몽골과의 정식 국교의 시작이었다.
그러나 몽골은 거란의 토멸이 고려에 큰 은혜를 베푼 양 해마다 상례로 과중한 공물(貢物)을 받아갔으며, 1225년에는 공물을 요구하러 고려에 왔다가 돌아가던 몽골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