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풍납토성과 하남위례성
풍납토성이 학계의 주목을 받기 시작한 것은 1925년(乙丑年) 8월 대홍수로 서벽이 유실될 당시 중국제 靑銅·斗를 비롯하여 耳飾金環·銅弩·白銅鏡·銙帶金具·紫紺色 琉璃玉, 4구획 원문수막새 등 중요 유물이 다량 출토되면서부터라고 할 수 있다. 성 내부에서 이렇듯
土城)과 풍납토성(風納土城) 등 한성 도읍기 백제 개로왕이 고구려 장수왕의 침략으로 한성전투에서 전사함으로서 지금의 공주인 웅진으로 천도한 475년까지의 기간을 말한다.
의 핵심 지역이 된다. 사실 왕성의 소재지를 파악과 관련해서는 왕릉군의 소재지 파악이 선결되어야 한다. 왕릉과 왕성은 상
백제의 첫 왕도
- 풍납토성과 몽촌토성
- 목 차 -
Ⅰ.들어가는 말
Ⅱ.본론
1.풍납토성
1)개관
2)경당지구 및 관련 유적
3)출토유물
4)성곽
2.몽촌토성
1)개관
2)성벽 및 관련 유적
3)역사적 성격
3.풍납토성과 몽촌토성과의 비교
Ⅲ.나오는 말
Ⅰ.들어가는 말
풍납토성(風納土城)은 백제 최대의 군사기지로서
風納洞 土城內)는 소위 김해식(金海式)토기와 기와집을 짓고 살았던 유적층이 조사 확인되었다. 백제가 마한(馬韓)의 여러 부족국가를 통합하여 강성하게 되는 것은 고이왕(古爾王, 234-285)때부터로 보인다.
백제가 마한을 전부 정벌하여 고대국가로 등장하는 것은 근초고왕(近肖古王)(346-374)대이다. 근
백제(百濟)가 한강(漢江)유역에서 건국(建國)․발전(發展)했던 때의 대표적(代表的)인 토성(土城)이다. 몽촌토성은 한강지류에 해당하는 이곳의 자연 지형을 이용하여 진흙을 쌓아 성벽을 만들었고, 특히 북벽의 단을 이룬 곳에서는 나무울타리를 세웠으며, 그 외곽에는 해자가 둘러져 있었음이 확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