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야가 제외되면서 고대 수 백년 간 경남일대의 영역을 차지하면서 존속했던 가야는 역사상 소외되고 잊혀 진 나라가 되었다.
이렇게 우리나라 고대사에 관한 전통적인 이해가 삼국사기 이래로 삼국을 중심으로 이어져 온데다 변한지역의 가야세력이 4세기 이후 이 지역에서 삼국에 견줄만한 중앙집
3. 정치조직과 신앙
1) 지배권역
6세기 초 백제와 대가야 사이를 문헌사료가 없으므로 고고학 자료를 통하여 대강의 상황을 살펴볼 수밖에 없다. 대가야의 세력권은 고령에서부터 서쪽으로 확산되어 지리산 북쪽까지임을 알 수가 있다. 이것은 고령 지산동 고분군에서 출토되는 대표적인 토기형
가야의 관계를 더 이상 추정하기 어렵다. 그러나 『삼국사기』신라본기의 초기 기록에는 설화자료를 편년체로 편찬하는 과정의 한계성 때문에 사료상의 문제점은 있다 하여도, 기원후 102년 8월조에 <금관국> 수로왕이 분쟁을 중재하였다는 설화기사를 제외하고는 이 낙동강 유역의 세력을 모두 <가야>
Ⅱ. 가야의 멸망 과정
역사상에 나타났던 정치세력들은 그 시초를 알기는 어려우나, 멸망과정에 대해서는 비교적 자세한 결말을 전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가야의 경우에는 체계적인 역사기록을 남기지 못한 채 562년 신라에게 멸망함으로써, 그 세력의 성장 과정뿐만 아니라 멸망 과정 이르기까지
Ⅰ. 가야시대의 형성과 발전
김해 지방을 중심으로 존립했던 정치 집단 중에 삼국의 변진 구야 국(狗耶國) 과 같은 집단은 철 자원의 발달, 농업의 다양화, 정치, 문화적 발달 속에서 수로(首露) 집단과 같은 새로운 지배 세력을 바탕으로 적극적인 계기가 되었다. 그러므로 수로집단의 대두와 구야 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