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리학적 교양을 지닌 당시 지식인들의 무능력함을 비판하고 각성시키고자 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철저한 성리학자로서 성리학자의 무능을 비판한 것은 상호 모순이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갈암은 성리학자도 진정한 유학자가 되기 위하여는 경세유용적인 학문에 대한 관심과 이해 그리고 실천력을 가
갈암이 율곡의 학문을 비판한 [栗谷李氏論四端七情之辨]은 어떠한 배경에 의해 이루어진 것일까? 현상적으로 볼 때 [율곡이씨논사단칠정지변]이 경신환국을 통해 서인에 의해 남인이 정치적 박해를 당하고 있던 시점에 지어졌다는 사실을 당시까지의 그의 정치적 행로와 연관시켜 본다면 그의 율곡 비
것이다. 목은에 있어서 四端을 확충한다는 방법이 誠을 실천하는 것으로 대치되고 이는 다시 敬을 유지하는 것으로 설명됨으로써 결국 목은에 있어서의 실천적 수양론은 持敬으로 귀일된다. 즉 중국 성리학에서 설정한 居敬과 窮理의 두 수양방법이 한국에서는 居敬 하나로 단일화 된 것이다.
성리학자들을 당혹케 했다.
“퇴계 고봉 율곡 우계는 모두 사단을 순선하다고 여겼으나 주자는 사단에도 불선한 점이 있다고 여겼다. 알지 못하겠도다. 네 분 선생님들은 주자의 이 말을 보지 못했는가. 사단이 어떻게 불선할 수 있는가. 사단도 기발이이승하기 때문이다. 발할때 그 기가 청명하면 이
전통은 성종 때에 본격적으로 중앙 정계에 진출한 사림이 계승하였다. 이들은 형벌보다는 교화에 의한 통치를 강조하였으며, 공신과 외척의 비리와 횡포를 성리학적 명분론에 입각하여 비판하고, 당시의 사회 모순을 성리학적 이념과 제도의 실천으로 극복해보려고 하였다.
2) 조선전기 유학
고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