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민적 근대화 노선을 추구하는 농민운동이었다. 정창렬, 「갑오농민전쟁에서 농민군의 변혁사상」, 『제 5 회 한국학 학술발표회 기념 : 제 5 회 한국학 학술발표 논문』, 계명대학교 한국학 연구소, 1991년, 73쪽
1893년의 보은집회가 사실상 1894년 갑오농민전쟁의 전주곡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으며
농민봉기의 형태를 띠며, 나아가 사회혁명에의 강렬한 의지까지 내포하였던 갑오농민전쟁을 조선 후기의 사회․경제적 변화와 이를 토대로 한 사회변동의 가속화의 관점에서 바라보고자 한다. 또한, 당시 조선 민중이 이땅에서 진정 어떻게 살아왔고, 또 무엇을 위해 싸우다 쓰러져갔는지 확인해보
농민반란', '동학농민운동', '동학혁명'등 으로 많은 해석이 있다. 그 중에서도 주로 실패한 혁명이냐 혁명운동이냐라는 문제와 혁명으로 보기에는 힘든 아직 혁명이나 혁명운동의 수준에 도달하지 못한 농민봉기, 농민전쟁, 농민운동으로 보느냐로 크게 나누어 볼 수있겠다.
1894년에 일어난 갑오동학
농민층에게 열렬한 환영을 받게 한 것은 그 평등사상과 휴머니즘(인본주의)이었다.
동학사상은 우주와 만물이 모두 ‘至氣’로 구성되었다는 ‘至氣一元’論을 주창하면서 ‘天一合一’論을 도출하고 ‘侍天主’사상을 정립하여 매우 독창적인 구조의 평등사상과 휴머니즘을 만들어 냄으로써 사
모든 역사적 사건들이 그러하듯 갑오농민전쟁 역시 19세기 서양제국주의 열강들의 침투와 조 선 정부의 부패와 혼란이라는 시대적 배경과 그에 따른 빈번한 민란의 발생이라는 사회적 분 위기 속에서 발발하게 된다. 부동항 확보를 위해 남하정책을 시도하는 러시아 세력의 침투와 이러한 러시아의 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