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진과 병영
조선초 병영이 설치된 후 이곳에는 3,000호가 살 만큼 번성하였다. 그런데 동학 농민군의 병영성 점령으로 성은 불타고 이듬해인 1895년 병영이 폐지되었다.
전라도 육군의 지휘소인 병영을 이곳에 설치하게 된 군사․지리적 이유는 당시 병영의 융성함을 반증하는 증거의 하나로 강진
전남 강진군 도암면. 조선 실학의 대가 다산 정약용이 강진에서 18년간의 유배생활 중 10년을 머문 곳으로 초가집이었던 것을 기와로 복원하였다.
위치 : 전남 강진군(康津郡) 도암면(道岩面) 만덕리(萬德里)
유적의 중심이 되는 다산초당(茶山草堂)은 5칸 도리단층의 기와집으로, 측면 2칸은 뒤가 거실이
강진(康津)으로 옮겨져서 이후 오랜 유배기가 시작되었다.
1818년 9월 14일 유배가 풀리기까지 18년간 그는 경사(經史)에 걸친 전 학문을 체계화였으며,이때부터 정치 경제적 인식의 사상적 기반이 되는 경서학(經書學)의 연구에 몰두하였다.
귀양이 풀려 고향에 돌아온 다산은 학문연구와 저술에 전념
영랑(永郞) 김윤식론
1. 작가의 생애와 활동
영랑(永郞) 김윤식(金允植)은 1903년 1월 16일 전남 강진군 강진은 정약용, 김정희, 초의 등의 이름 때문에 널리 알려진 곳이며, 그들이 끼친 영향은 꽤 깊게 남아 있어 보인다. 김영랑, 박용철, 김현구를 康津詩派라 부르기도 한다. 강진시파의 원공간인 강진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