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도조약을 맺고 문호를 열게 되었다
흥선대원군 이하응은 1820년 영조의 고손자인 남연군 이구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에게 학문을 배운 이하응은 1843년(헌종9) 흥선군에 봉해졌다. 이하응은 왕족이었지만 안동김씨의 세도정치 밑에서 불우하게 지냈다. 그 당시 똑똑한 왕족을 죽이기까지
등거리외교를 통해 서로 견제를 유도하려는 고종의 노력이 포함되었던 것이다.
2. 운요호사건과 개항
일본은 1875년 중무장한 군함 운요호를 강화도 초지진에 접근시켜 조선 측의 발포를 유도했다. 그리고 이를 계기로 일본 내 반한감정을 고취, 대규모 파병준비를 하면서 수교회담을 요구하였다.
강화도조약의 공식 명칭은 조일수호조약이며, 병자수호조약이라고도 한다. 1868년 메이지 유신을 단행한 일본은 이미 외교관계를 맺고 있던 영국·프랑스·미국 등에 왕정복고를 통고하는 한편, 대마도주 무세[宗義達]를 외국사무국보(外國事務局輔)로 임명하여 조선에 대한 국교의 재개를 요청하는 국
Ⅰ. 서론
쇄국에서 개국으로의 전환이 자율적인가 타율적인가는 그 후의 대외관계에 커다란 영향을 준다. 내재적인 개국론이 고립된 상태에서 개국은 대일 수교의 경우에는 무력적 압력에 의해, 대미수교의 경우에는 청국의 종주권 압력을 빌려 모두 타율적으로 밖에 될 수 없었다. 문제는 식민지로
Ⅰ. 서론
1876년 12월 박규수 사후에 개화파는 점차 의견과 노선의 대립이 생겨 온건 개화파와 급진개화파의 두 파로 나눠지게 되었다. 온건개화파는 조선사회가 점진적으로 개화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온건노선을 취하였고, 급진개화파는 조선사회가 적극적이고도 급진적인 방향으로 개화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