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간과 확장을 통해 추진되었고, 이 중에서도 농지의 개간이 절박했다. 그것은 고려 말기, 倭寇의 침략으로 우리나라 沿岸 일대의 농토가 황폐화되고 人民의 流亡이 속출하여 경제 기반이 흔들리고 있던 상황이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농민들은 지배층의 수탈에 의해 몰락하여 無田農民으로 전락하는
1. 들어가며
‘개간(開墾)’은 산림이나 원야(原野), 또는 하천부지를 농업상 이용하기 위해 농지로 조성하고 그에 따라 관개, 배수시설 등을 신설, 변경하는 일을 총칭한다. ‘농업’을 국가 주요 산업으로 육성한 조선 시대에도 개간은 중요한 일이었다. 그러므로 개간의 문제는 국가의 권농정책과
2) 민통선 지역의 축소
1980년대 중반 뒤 북한과 체제·이념 경쟁 속에 건설되었던 선전촌, 자립안정촌, 통일촌 같은 개념이 희석되기 시작했다. 그와 함께 주민들 중심으로 ‘민통선 출입절차의 간소화’, ‘영농활동을 위한 시설규제 완화’에 대한 요구가 증가하면서 민통선이 북상하기 시작했다. 그
1. 들어가며
도시와 상업이 번창했던 고대 로마 시기와는 달리 중세 초기에는 전쟁과 침략으로 인한 피해로 인해 농업이 사회의 기본이 되었다. 중세의 농민들은 열악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개간이나 기술의 개발을 통해 “농업 혁명”이라 불릴 정도의 대단한 생산 향상을 일구어 냈고 이는 곧 상업과
정계의 배경
가. 북관정비(北關整備)와 두만강변 개간지 확대
조선은 건국 후 태종조에서 세종조에 걸쳐 여진족을 무력으로 축출하고 압록강 중류의 강변을 따라 자성(慈城), 우예(虞芮), 무창(茂昌), 여연(閭延) 등 4군(郡)을 두었으며, 두만강 하류지역에 부령(富寧), 회령(會寧), 경성(鏡城), 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