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 불교개혁 운동은 시대의 요청이었다. 600여년 동안 조선 왕조를 굳건하게 유지해주었던 유교 이념의 한계가 드러나기 시작하면서 조선은 내부적으로 흔들리기 시작하였고 이 무렵 개화기를 맞아 세계 열강의 문물들이 빠르게 조선으로 흡수되기 시작했다. 때를 같이하여 일본과 강제 합방 조약을
불교개혁에 몰두해 있었다.
그의 승려생활에서 얻은 지식, 근대 학문과의 만남, 서양 기독교 선교사들과의 만남은 그가 왕위에 등극한 후 많은 영향을 미쳤다. 몽꿋은 서양세력에 관한 지식을 통해 태국이 독립을 보전하고, 아편전쟁 후 중국이 겪었던 것과 같은 수모를 당하지 않기 위해서는 서방세계
고려 말, 북방 유목민족의 침략과 지배가 있고 수도의 강화도 천도는 문벌귀족의 몰락과 함께 고려 전지역에 걸쳐 새로운 지도층으로 부각한 신진 사대부 계층의 성장을 가져왔다. 신진사대부의 등장은 고려조의 전통적 지배 이념인 불교와의 대립은 불가피하게 되었으며, 이들은 부패한 구질서에 대
불교사상은 권문세가와 결탁되어 있어 종교적 기능이나 사회적 기능을 상실한 것은 사실이 아닐 수 없다. 즉 정도전은 주자학은 수용한 학자로서의 입장은 불교가 권문세가와 결탁되어 타락했다고 확실히 믿고 있는 것이다.
정도전 계열의 사대부들은 불교개혁에 있어서 사원의 주지를 도행(道行)
불교 이념에 지배되던 사회였다. 당대 말기의 유학자들이 당시 사회의 문제점이 상당 부분 불교 때문에 나타난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처럼 고려말의 신진사대부들도 불교 때문에 당시의 사회가 곤란을 겪고 있다고 판단하였다. 그래서 당시의 신진 사대부들은 낡은 사회를 개혁하고 새로운 사회를 건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