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동마을
(1) 개 요
월설의 양동은 안동의 하회마을과 함께 현존하는 대표적인 조선조의 동성취락으로써 그곳에서는 한국에서도 보기드문 수많은 조선조의 상류주택을 포함하여 150호가 집중되어져 있다.
양동은 경주로부터 북방 25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 자리하고 있다. 국도의 녹음속에
경주부(慶州府) 고적조(古跡條)에 천관사(寺)에서 지은 것으로 추측되는 한시(漢詩)가 있는 것으로 보아 <원사(怨詞)>가 고려 때까지도 불려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원사>의 가사는 전해지지 않기 때문에 노래의 내용은 전혀 알 수 없고 설화를 바탕으로 추측하여 본다면 여인의 애끓는 노래가
23) 영남지방의 행정 관청인 안동대도호부(安東大都護府)가 설치되었다. 987년(성종 6) 동경(東京)으로 바꾸고, 유수사(留守使)를 두었으며 1012년(현종 3)에 다시 경주가 되었다. 한동안 경주부에 설치된 경상좌도(慶尙左道)의 감영(監營)이 1601년(선조 34)에 대구로 이동된 후 경주의 지위는 약화되었다.
경주부 관내의 밀양, 청도, 창녕, 영산, 현풍, 그리고 상주목 관내의 성주, 합천, 고령, 초계가 남명학파의 지역적 범위에 들어간다고 하겠다. 남명당시 그의 사우, 문인의 분포 지역과 그의 족적이 미친 범위는 경상우도를 벗어나기도 했지만, 17세기 후반 이래 남명학파의 지역적 범위는 대체로 위에 열
해석된다. 또 신라시대 창녀와 음방(淫坊)이 있었음을 이인로의 『파한집(破閑集』 및 『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 경주부(慶州府) 불우조(佛宇條)에 실려있는 김유신과 천관녀의 이야기를 들고 있는데, 원화와 화랑제도가 있을 당시에 매음풍속이 있었던 것을 기녀의 기원이라고 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