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거지의 출입구조는 거주공간에 부속된 작은 공간에 위치하고 있으며, 원삼국시대의 전통을 따르는 것으로 연구되고 있다. 이러한 주거지는 파주 주월리, 서울 몽촌토성, 하남 미사리 유적 등이 있다. 원삼국시대의 呂자형 출입시설은 방형을 이루지만, 3세기 중반 이후의 한성 백제시대에는 사다리꼴
백제, 신라들이 부족국가 형태로 정치, 사화제도를 이루면서 생활하였던 시대이다.
이 시대의 주거, 나아가 난방시설에 대한 기록을 찾아보기 이전에 최근 조사 발굴된 전라남도 승주군 낙수리와 승주군 대곡리 유적등 주암(住岩)댐 수몰지구에서 조사 발굴된 주거지들을 살펴보면 철기시대의 주거지
문화의 핵심으로 높이 선양했다.
이 시기 조선사 편수회 중심으로 일본 관학자들이 연구한 조선사에서 단군조선은 철저하게 부정되었다. 일제 관학자들은 위서에 나온다는 단군전설이 현재 남아 있는 25사의 한 책인 위서에 보이지 않으니 허구라고 주장했다. 게다가 고려 중기에 편찬된 ‘고려 도경
생활관인 동시에 사후관이며, 생사관인 것이다. 이제부터 시기별로 장묘문화의 형태를 고찰하여 보겠다.
1) 고대의 장례
선사이전에는 기록은 물론 유적이나 유물이 없어 당시의 생활상을 미루어 추정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선사시대에는 역사적 기록은 없지만 유적이나 유물, 고분을 통해 당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