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의 멸망과 부흥운동
668년 나당연합군에 의해 수도인 평양성이 함락되면서 700년을 이어온 고구려는 멸망했다. 고구려를 점령한 당나라는 고구려의 영역을 9개 도독부, 42개 주(州), 100여 개 현(縣)으로 나누었다. 당나라는 평양에 안동도호부를 설치하여 설인귀에게 책임을 맡기고, 그 밑에 현지
고구려는 정복국가인 동시에 문화국가이다. 고구려는 기마를 이용한 우수한 기동력과 철기를 바탕으로한 국력을 배경으로 만주와 한반도 북부를 통합한 동방의 강국이었을 뿐만 아니라 일찍부터 고조선 문화를 계승하여 유기 신집으로 대표되는 역사서를 비롯하여 찬란한 고분벽화 등 수많은 문화 유
고구려
1. 성립과 발전
BC 37년에 주몽(朱蒙)이 이끈 부여족의 한 갈래가 압록강 지류인 동가강(佳江:渾江) 유역에 건국하였다고 한다. 고구려는 일찍이 기마민족의 문화를 받아들여 졸본 지방에서 일어나 동방 침입의 요로인 퉁거우[通溝]로 옮긴 뒤 낙랑군과 임둔군(臨屯郡)의 교통로를 단절시키는
부흥운동과 관련 하여 서술 할 것이며, 향후 그가 어떻게 행동하는지에 대한 기록도 알아 볼 것이다.
2 백제의 멸망과 외교적 고립
1) 7세기 국외 동맹체제
당시 한반도에는 냉기류가 흐르고 있었다. 고구려에서는 연개소문이 정권을 잡고, 백제에서는 義慈王이 즉위하자 순식간에 40여성을 빼앗는
고구려와 신라에 비해 사료가 부족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특히 백제의 인물에 관한 기록이 빈약하였다. 삼국사기에서도 50명의 전기 가운데 백제인은 단 3명의 인물인 계백, 흑치상지, 도미가 적은 분량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 중 백제 부흥운동의 선두자이며, 백제부흥운동을 진압하고 당나라의 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