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니시유키나가 (소서 해장) : 순천, 시마즈 요시히로 (도진 의홍) : 사천, 소조천 수추 : 부산 - 그 중, 고니시유키나가에 대처하고 남해상의 주도권 장악 의도
-호남 좌우도 바다를 제어할 수 있는 전략적 요충지로서의 위치
-식량 생산 가능 (섬 안에 농장, 농경지가 넓고, 유입인구가 많음)
2) 전쟁
고니시유키나가를 죽인다는 것이 소설 내용이다. 임진왜란을 마치고 무사 귀환한 후 일본내의 세력다툼속에서 죽은 고니시유키나가가 임진왜란 당시 평양성에서 김응서와 계월향에 의해 죽었다는 조선의 민간 설화를 바탕으로 둔 소설이다.
다른 세편의 단편 소설은 실제 식민지 시절 조선에 살았
고니시유키나가의 약 1만 8000 병력이 부산성을 공격하여 십수시간의 혈전 끝에 부산성을 사수하던 부산진첨사 정발 등의 전사로 성을 빼앗겼다. 이튿날 동래에 진격한 왜군들과 맞선 동래부사 송상현 이하 군민은 끝까지 항전하다 순국하였다.
부산과 동래를 함락시킨 왜군의 후속부대는 계속 상륙해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이르러서도 교세는 점점 확장되어 다이묘, 무사에서 상공인, 농민에 이르기까지 각지에 신자 조직이 생기고 히데요시의 측근 다이묘인 고니시유키나가마저도 기독교에 귀의하게 되었다.
이처럼 민중 사이에 기독교가 번져나가자 히데요시는 장차 기독교가 전국 지배에 방해가
명을 군선 약 700여 척에 태워 부산포에 상륙시켰다.
일본군 선발대 대장인 小西行長(고니시유키나가)은 14일 부산성을 공격하였다. 부산진을 함락시킨 일본군은 15일 東萊城을 약 2만의 군대로 포위 공격하였다. 부산성과 동래성 모두 군관민이 일본군에 저항했으나 중과부적으로 성이 함락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