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료를 토대로 이 글에서는 경기북부지역의 고구려 유적의 분포 이 글에서는 각 유적에 대한 상세한 설명은 생략하기로 한다. 자세한 내용은 참고문헌 및 논문 참고 바람.
, 구조와 기능을 살핀 뒤 고구려의 남진정책과 한강-임진강유역의 고구려 관련유적의 관련성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다.
고구려는 한사군(漢四郡)을 물리치는 과정에서 점차 강대해졌으며 6대 태조왕부터는 국가 체계가 정비되고 대외 발전을 꾀하였음. 소수림왕 때에는 불교를 받아들였으며 태학을 설치하고 율령을 반포하였다.
이 같은 기반에서 즉위한 광개토왕은 정복 군주로서 백제를 공격하여 임진강과 한강까지
고구려사회의 역사경험을 수용하고, 남하과정에서 선주집단과의 지속적 갈등을 경험하였을 것이다. 선주집단과 연맹관계를 맺기도 하였지만, 우수한 철기문화를 바탕으로 한 1세기 후반 유입집단인 그들은 군사집단적 측면이 부각된다. 그리고 한강하류 유역 정착시기에 선주정치세력인 마한의 대외
다)안학궁
-고구려시대의 궁궐로 알려져 있는데, 현재 빈 터만 남아있다.
- 위치 : 대성산성의 남쪽기슭에
- 출토 : 성 주변에는 기단식 적석총과 봉토석실분이 대규모의 무덤 떼를 형성, 도로유적, 우물 등을 비롯한 고구려시대의 생활유적이 다수 발견.
- 성 밖의 동서쪽에 해자를 만들어 궁성을 보
5) 병자호란 당시의 남한산성의 의미 : 남한산성의 돌맹이, 기왓장 하나까지도 나라를 지키기 위한 것 이었다. 남한산성은 우리역사 속에서 우리민족이 당한 침략에 대항한 항전 정신과 독립정신이 깃들어진 장소이다. 병자호란 당시에도 도성과 한강유역을 방어하는 군사적 최적의 요충지로서 비록 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