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공산당과 고려공산청년동맹 관련 활동
3.1 운동 후1921년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 상하이 지부 입당
→고려공산청년회의 책임비서로 활동
1922년 3월, 극동제민족대회에
이르쿠츠크파 대표단 참여
1922년 4월,공청조직의 책임자로 국내파견
1924년 출소 후 신사상연구회 가
Ⅰ. 박헌영의 생애
박헌영은 충청남도 예산(禮山)에서 태어났다. 1919년에 경성고보(현 경기고등학교)를 졸업하였으며, 3.1운동 이후 상해로 건너가서 1921년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에 입당하였다. 또한 고려공산청년동맹의 책임비서로 임명되어 활동하였다. 1922년에는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코민테
Ⅰ.서론
청년학생들은 사회변혁의 주인으로 존재했고 지금도 역시 그렇다. 일제시대의 3․1운동 ․ 6․10만세운동 ․ 광주학생운동, 해방이후의 민주화운동에서 청년학생층은 언제나 선도적 역할을 수행하였다. 따라서 여러 대중운동이 발전해나가는 데 커다란 영향을 미쳤으며, 수많은
청년, 학생, 선진노동자들은 대중단체와 여럿 서클을 만들었다. 그 중 1921년 서울에서 김사국, 이영 등이 서울청년회를 결성했다. 이들은 1922년 10월 ‘공산주의 그룹’ (고려공산동맹)을 조직하고 독자적인 강령과 조직체계를 갖춘 사회주의 정당을 건설하려 하였다. ‘서울파’로 불린 이들은 김사국
청년, 학생, 선진노동자들은 대중단체와 여럿 서클을 만들었다. 그 중 1921년 서울에서 김사국, 이영 등이 서울청년회를 결성했다. 이들은 1922년 10월 ‘공산주의 그룹’ (고려공산동맹)을 조직하고 독자적인 강령과 조직체계를 갖춘 사회주의 정당을 건설하려 하였다. ‘서울파’로 불린 이들은 김사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