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조의 총애가 시작되다
22세(癸卯年, 1783) 봄에는 경의과 진사시험에 합격하여 성균관에서 공부하게 됐다. 여기서 다산은 10년 연상인 33세의 정조를 처음 만난다. 정조가 중용강의(中庸講義) 80여 조목에 관하여 답변토록 과제를 냈다. 이발기발(理發氣發)의 문제에 있어서 이벽(李檗)은 퇴계 이황의
곡산부사곡산에 이계심(李啓心)이란 사람이 있었는데, 백성 천여 명을 이끌고 관청에 와서 백성들의 고초에 대해 항의하다 달아난 사건이 있었다. 그 이계심이 다산이 곡산으로 부임하는 길에 나타나 백성들의 고통 사항 10여 조목을 적은 글을 바치고는 길가에 엎드려 자수했다. 옆 사람들이 체포
곡산부사 등 외직으로 좌천되기도 하였다. 정조의 지극한 총애는 도리어 화를 자초하기도 하였는데 정조의 죽음과 때를 같이 하여 야기된 신유교옥에 연좌된 까닭도 여기에 있다. 왜냐하면, 신유교옥사건은 표면적인 이유와는 달리 벽파가 남인계의 시파를 제거하기 위하여 일으킨 사건으로 평가되기
곡산부사 등 외직으로 좌천되기도 하였다. 정조의 지극한 총애는 도리어 화를 자초하기도 하였는데 정조의 죽음과 때를 같이 하여 야기된 신유교옥에 연좌된 까닭도 여기에 있다. 왜냐하면, 신유교옥사건은 표면적인 이유와는 달리 벽파가 남인계의 시파를 제거하기 위하여 일으킨 사건으로 평가되기
곡산부사 임기 중 지방행정관으로서의 치적 등으로 장차 정조가 중용할 것이 예상됐다. 그러나 정적들은 다산의 성장과 그에 대한 정조의 총애에 위기감을 느끼며 천주교를 빌미로 그를 제거하고자 했다.
다산은 정조가 죽자 정적들에 의해 사지에 내몰렸다. 그리고 겨우 목숨을 건져 18년간의 긴 유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