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정록(過庭錄)》에서 묘사하고 있는 것을 보면, 큰 키에 살이 쪄서 몸집이 매우 컸으며 얼굴은 긴 편이었고, 안색이 몹시 붉었으며 광대뼈가 툭 불거져 나오고 눈에는 쌍꺼풀이 있었다고 한다. 이 기록은 현재 남아있는 박지원의 초상화와도 거의 일치한다. 또한 박지원은 목소리가 몹시 커서 그냥 말
과정록』에 의하면 연암은 중년 이후 장자에 출입하기도 했다고 한다. 박수밀, ‘박지원의 노장사상 수용과 신선관’, 『도교문화연구』 제22집, 한국도교문화학회, 2005. p. 36
또한 그는 열하일기 서문에서 장주를 언급함으로써 그가 장자의 영향을 짙게 받았음을 자백하고 있고, 「호질」의 후지에서는
과정록(過庭綠)』에 의하면, “나는 번거롭고 꾸밈을 제거하고 오로지 실사(實事)에 힘쓰고자 한다”라고 하여 번거롭고 꾸밈을 좋아하는 허례의식을 배격하였으며, 그가 대상으로 삼은 학문의 내용은 그 당시 조선 사회를 풍미하였던 성리학이 아니라, “글을 읽고서 실용(實用)을 알지 못하는 것은
쌍거풀이 지셨으며 귀는 크고 희셨다. 광대뼈는 귀밑까지 이어졌고 기름한 얼굴에 수염이 듬성듬성하셨으며 이마 위에는 주름이 있는데 마치 달을 치어다 볼 때 그러한 것 같았다. 키가 커 훤칠하셨으며 어깨와 등은 곧추섰고 정신과 풍채는 활달하셨다. 박종채,『과정록』, 한국한문학연구, 제6집.
과정록’에 의하면 23세에 모친타계, 31세에 부친타계로 나온다. 어린 시절에는 공부에 신경쓰지 않은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는 연암의 아버지가 전혀 벼슬을 못한 것으로 보아 자식의 학문에도 무관심하였던 탓이 아닐까 생각된다. 그의 형과 형수를 더 따랐다고 기록되어 있다. 16세에 조부가 타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