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개토대왕 시대는 고구려사를 구획하는 영광의 시대라 할 것이며, 민족사에 있어서는 격동하는 동아의 정세 속에서 움트기 시작한 민족의식을 기반으로 하여 새로운 통일질서의 구축에 부심하던 전환기라 할 것이다.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이 광개토대왕릉비에 나
Ⅰ. 들어가며
1.비문의 구성Missin'-link ' 한국고대사연구회
광개토왕비문(廣開土王碑文)(이후 ‘비문’으로 약칭)은 4면에 걸쳐 모두 44행 총 1,775자(보이지 않는 글자까지 합하면 총 1,802자)가 적혀있다. 비문의 내용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누어진다. 첫째 부분은 고구려 왕실의 계보와 약력을 기록
4) 송서(宋書)
중국 남북조시대 남송(420~479)의 역사를 담고 있는 송서에는 5세기에 남송에 조공을 바친 왜의 5왕이 등장한다. 이 가운데 무왕(武王)이 스스로 왜․백제․신라․임나․가라(가야)․진한․모한 등 7국의 왕을 칭하면서 남송의 황제에게 이를 인정해 줄 것을 요청하자
왕으로 재위하면서 통치한 과거를 내용으로 하고 있는데, 장수왕은 <비문>을 구성하면서 수묘를 실천하는 역으로 자신을 설정하는 방법으로 <비문>의 세계와 자신을 접속시켜 놓았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 세계를 계승하는 방법으로 현세를 통치하는 자신의 정통성을 확보하고 있는 것이다.
광개토왕
오늘날에도 꼭 짚고 넘어가야 할 대목이라 생각한다. 고구려의 대외정복활동은 4세기 말에서 5세기 초에 가장 활발했고 성과도 가장 컸다. 이 시기의 두 왕이 바로 광개토왕과 장수왕이다. 이 글에서는 고구려의 대외관계와 영토확장과정에 관해서 주로 알아보고 그 의미를 고찰해 보도록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