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론>
현재 서울시에서 추진 중인 청계천 복원사업은 고가&복개구조물의 낙후에 따른 안전성 문제와 주변환경개선 등 도시환경적 측면에서의 필요성도 있으나 청계천이 복개되기 전 즉, 조선시대의 서민들의 생활공간이자 문화공간이었던 역사의 현장으로서의 청계천을 복원하고자 하는 의미도 크
태종 6년(1406)년의 기록이다. 이 기록을 보면 한성부에 6백명인데, ‘개천을 파는 일을 맡았다‘ 라는 부분이 있다. 이 개천을 파는 일이 바로 청계천을 파는 작업이었을 것이라 생각된다. 궁궐을 만드는 일과 함께 하는 것을 보면 그만큼 국가의 큰 사업이었음을 말하는 것이다.
장의동(藏義洞) 어귀
당시 정월보름의 분위기는 활기차고 여유가 있는 평화로운 모습이다. 정월 보름을 예찬한 것으로 보이는데 이것으로 보아 지금과는 다른 큰 명절이었음을 알 수 있다. 위에서 언급되는 약밥, 연놀이, 화간은 정월 보름에 먹던 음식과 풍속인데, <<조선세시기>> 이석호 역주譯註. 조선세시기, 서울: 동문
광통교 상류 약 136m를 시작으로 1958년부터 본격적으로 복개되기 시작하였다. 1958년 5월∼1961년 12월 광교에서 청계6가 동대문운동장까지, 1965년∼1967년 청계 6가에서부터 청계8가 신설동까지, 1970년∼1977년 청계 8가에서부터 신답철교까지 복개되었고 광교에서부터 마장동에 이르는 총 길이 5,6km, 폭 16m의
광통교까지의 구간에 불과했다.
1945년 8월 15일 광복 후 대한민국 정부수립까지는 정치적 혼란기로 건설 전반이 거의 중단된 상태였다. 따라서 서울시 하수로는 거의 방임 상태였으며 하수로 유지사업마저도 제대로 하지 못할 정도의 재정 상태였다. 이어 북한의 불법 남침으로 역사상 유래 없는 참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