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산주의와 사회주의에 대응하여 교회가 중심이 되어 펼친 사회계몽의 여러 운동들을 살펴보고자 한다. 그리고 신학적 갈등으로 인한 교회 분열의 조짐들을 살펴보고 마지막으로 이 시기의 북방선교를 살펴보도록 하겠다.
Ⅱ. 1920~30년대의 교회 상황
1. 길선주(吉善宙)목사의 사경회
길선주 목
있으며, 항일의식을 약화시킨다. 또한 자본주의와 제국주의의 도구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다.”
1920년대 한국교회는 농촌경제 등의 사회문제에 대해 무관심하여, 이에 실망한 청년들이 교회를 떠나 사회주의자가 되는 일이 많았다.
반면 보수 개신교는 정교분리를 주장하면서 항일 운동에 소극적.
기독교인들이 해야 할 일은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 세우는 것이지, 민족적인 차이로 우월감을 갖거나 갈등을 겪는 것이 아니다,”라며 선교사들의 백인 우월주의로 인한 선교사들과 한국인 성직자들간의 내분을 비판하였으며, 춘원 이광수는 1920년 발표한 <금일 조선교회의 문제점>에서 조선교회의
그 영향력이 높다.
1.북한의 종교 집단
1) 천도교 청우당 : 북한의 유일한 종교정당인 `조선천도교청우당'의 기층조직인 '접'(接)은 5-10명의 당원으로 구성되며, 연 1회 접사업 총화를 통해 '접대표'와 '부대표'를 선출하는 것으로 확인된다. 또 당원들은 매월 수입의 1%를 의무 당비로 납부하고, 입당
운동 제기 동기에서의 선정 요인 중 도덕적 퇴책에 대한 저항이란 각도에서 심각한 문제로 시종 외쳐지고, 또 세계에 통지 되었다.
그러나 1920년대부터 1940년까지의 한국교회의 사회운동은 사회봉사, 사회사업, 사회개선, 그리고 절실한 당신의 민족적 사활의 문제로 등장한 농촌운동의 형태로 나타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