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시가』등이, 종합지로서는 『신세기』『춘추』등이 모두 1941년에 창간된다. 이들 잡지들은 1942년 『대동아』로 개정된 1930년대의 대표적인 종합잡지 『삼천리』와 함께 친일의 앞자리에 서게 된다.
이 시련기에 있어서 한국 문인이 취할 수 있는 길은 세 가지였다. 첫째, 일제에 굴복하는 길, 둘
국민시가』, 기타 『신시대』『춘추』등의 종합지들의 창간이 그것이다. 한국어의 공적 사용이 전면적으로 금지된 까닭에 한국어를 매체로 한국문학이 존립할 수 없게 되었다. 또한 항일의 간접적이고 우회적인 표현도 허용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일제의 군국주의를 지지하고 찬양할 것을 요구했
국민시가』에서 활동함과 동시에 일본의 종군기자 생활을 시작한다. 이때 그는 최재서(崔載瑞)의 주선으로 『국민문학』과 『국민시가』의 편집 일을 맡고, 본격적으로 친일작품을 양산하게 된다. 그는 친일작품을 통해 독립을 위해 힘쓰는 동족을 ‘불령선인’으로 매도하고, 조선 청년들에게 일본
국민시가 있어야 하는데 그것을 시조에서 찾아야 한다고 밝혔다. 또한 국민시는 간결한 형(型)과 서민적이고 주변적이며 평명(平明)한 내용을 갖추어야 한다고 하였다. 이러한 태도는 그의 작품에 잘 반영되어 있다. 추천 작품 〈달밤〉에는 이러한 점이 잘 나타나고 있는데 “아무 억지도, 꾸밈도, 구
국민시가」의 편집 일을 맡아 본격적으로 친일 작품을 양산한다. 그가 쓴 친일작품은 시, 평론, 수필, 단편소설, 르포 등 11편에 이른다.
3) 해방 이후의 활동 -1946년 3월 ‘전조선문필가협회’에서 시분과위원회 위원장을 맡았으며 1948년에는 동아일보 사회부장, 1949년에는 ‘한국문학가협회’의 시분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