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도 그 기능을 제대로 수행하기 어려웠다. 그 결과로 국학교육이 침체되고 승보시가 일시 중단되는 사태도 일어났다.
하지만 그런 피난 시대임에도 불구하고 국학의 명맥은 유지되었는데 천도직후는 강화향교를 국자감으로 삼았고, 이후에는 새 국자감을 건설하여 그 명맥을 이어갔다. 혼란스런
국학이라는 관학이 설립되어 예부에 속하였다. 국학은 그 운영 제도면에서나 교육과정상 당나라이 영향을 많이 받고 있다. 국학의 직제로서는 그 우두머리로 경 1명을 두고 그 밑에 박사, 조교, 대사 2명, 사 4명을 두었다. 국학은 15세 이상 30세 미만의 학생들이 입학할 수 있었다. 학생들은 원칙상 최대
교육기관이다.
2) 교육내용에 관한 기록이 없어 구체적인 대학의 이념과 학제, 그리고 교육내용에 대해서는 알 수가 없다.
3) 그러나 학교의 설립은 귀족자제들에 대한 한문, 한자 그리고 충효사상의 교습을 전제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당시 중국 국학의 교육내용인 오경(시전, 서전, 주역, 예기, 춘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