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일전쟁과 을사조약에 대한 조선 내부의 대응
-유생들과 기타 백성들을 중심으로-
1. 서론
2. 일본군의 압력
1) 군율 시행과 군사경찰 운용
2) 군용지 수용
3) 인력 동원
3. 유생들의 대응
1) 대응양태: 상소, 자결, 통문, 거의, 거수, 외교
2) 현실인식과 대응논리
4. 기타 백성들의 대응
1) 대응양태: 시설파괴
군율이 지켜지도록 하였다. 겁을 먹었거나 판단을 잘못한 병사, 전투 중에 명령에 불복한 병사는 그 행동을 공개하여 그 과오를 시정해야 함을 배우지 않으면 안 된다.병사를 비난하거나 때리거나 그 외 군율을 어긴 지휘자는 대중재판의 앞에 서서 답변하지 않으면 안되고, 만약 유죄인 경우는 사령부
군율종사니
?? [f?nr?o] 말썽, 혼란(스럽다)
세적은 탄압해 내지 못하고 곤궁해 계책이 생겨 곧장 성토해 말했다. “원총통이 이미 단지귀를 파견해 입궁하게 하여 그는 군인이니 너희들의 이런 말썽을 보면 군율로 다스릴 것이다.”
宮監們聽到此語, 方漸平靜, 但檢點宮中失物, 約已値價洋十萬元。
궁
군율을 내세워서야 간신히 통제를 할 수 있었지만 이건 전쟁의 거의 막바지 이야기였다.
당시의 시대가 마지막 십자군 전쟁의 열광이 끝난지 얼마되지도 않았기에 사회는 종교적 분위기가 꽤 강했다. 물론 이런 열광은 종종 토속적인 미신과 혼합되어 기복적인 성격을 띄는 경우가 많았기에 여기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