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본관
(1). 선사. 원삼국실
경주와 그 주변 지방은 신라의 유적이 많이 남아 있어 활발한 조사가 이루어졌지만 상대적으로 그 이전의 선사시대에 대해서는 조사가 많이 이루어지지 않아 우연히 드러나는 유적에 대한 단편적인 조사만 실시되었다. 이 전시실에는 신석기․청동기&
귀면와의 역할이나 이를 형상화해서 사용한 목적은 酸邪行爲에 기초를 두고 있기 때문에 도깨비의 본질과는 거리가 멀다. 귀면와 이외에도 장승이나 벅수의 형상에서 도깨비의 얼굴을 찾아보려는 노력들도 역시 이런 양상과 무관하지 않다. 이런 견해는 도깨비의 본질을 더욱 미궁으로 빠지게 할 수도
귀면와, 암막새 기와, 수막새 기와 등이 출토되었다. 이들 출토품들은 경주지역에서 발견되는 것과는 다소 차이가 있는 형태로서, 지역적 특성을 잘 보여주고 있다.
1948년 10월경에 정원(貞原)20년 (804)의 명(銘)이 있는 선림원 동종이 인근의 숯을 굽는 사람들에 의하여 완전한 상태로 출토된 바 있다. 이
귀면와(鬼面瓦)를 ‘도깨비와’로 부르는 왜곡까지 생겨났다. 이것은 도깨비가 한국인에게 과연 무엇이었는가를 모호하게 만드는 역할을 했다고 생각된다. 도깨비는 그런 점에서 서럽다고 하겠다. 도깨비가 도깨비대로의 모습을 갖지 못하고 남의 나라 요괴의 모습으로 전락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귀면와(鬼面瓦)를 비롯한 신라 및 고려시대의 와당 등이 발견되었다.
이 절에는 775년(경덕왕 14) 본피부(本彼部)의 강고내미(强古乃未)가 구리 30만 6700근을 들여 만들었다는 약사여래동상이 있었다는데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고 한다. 원효(元曉)가 이곳에서 《화엄경소(華嚴經疏)》를 썼고, 솔거가 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