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세 유럽도 존재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리스의 노예는 정복에 의한 포로, 몰락한 소농(小農), 노예 집안 출생 및 팔렸거나 버려진 어린아이, 법률에 의한 채무노예(債務奴隸), 소아유괴(小兒誘拐) 에 의한 노예 등으로 이루어졌고, 그 수는 기원전 4세기경의 아테네에 40만명, 다시 말하면 성년 남자
2) 토지조사사업
1910년부터 1918년까지 일제에 의해 실시된 토지조사사업은 현재 우리나라 토지제도의 근간을 이룬 작업이었다는 점에서, 또 그와 반대로 일제가 조선통치의 목적으로 우리의 전통적 토지제도를 일본법으로 ‘법인’하였다는 점에서 주목을 받아왔다. 즉 토지조사사업에 대한 이해는
사회적 현상에 부딪혔고, 이로 인해 일시적인 쌀 수급 부족 현상이 나타나고 있었다. 이에 일제는 조선에서의 식량 증산을 강행하여 식량의 안정된 공급을 확보하려 했으며, 이에 따라 실시된 것이 산미증식계획이었다.
이러한 산미증식계획에 대한 식민지근대화론과 내재적발전론의 상반된 인식을
사회에 관한 기술을 뜻한다. 한국학은 한반도라는 지리적 위치에서 발생한 모든 학문을 뜻하며 한국 고유의 전통지리학과 전통지리사상은 우리나라 풍토에 깊이 뿌리박은 것이기 때문에, 한국 땅과 사람의 문화와 경관을 이해하기 위한 중요한 연구 주제이다. 마지막으로 보다 구체적인 현실 인식을
바가 없었다. 조선역사가 출간된 바로 이듬해, 당시 일본에서 좌익활동에 종사하고 있던 이북만은 칼 마르크스의 소위 ‘아시아적 생산양식’을 봉건제도의 동양적 형태라고 간주하는 입장에서 통일신라시대 이후를 봉건제사회로 규정하는 논문을 일본의 역사과학(1~4)에 발표했다. 당시 유물사관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