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귀족출신의 이찬 칠숙,아찬 석품의 모반과 실패
53년(631) 여름 5월에 이찬 칠숙이 아찬 석품과 반란을 꾀하였다. 왕이 이를 알아
차리고 칠숙을 잡아 그를 동쪽 시장에서 목베고 구족(九族)까지 멸했다. 아찬 석품은
도망하여 백제의 국경에까지 이르렀다가 아내와 자식들을 만나보고자 하여, 낮에
귀족세력 간의 정치투쟁 : 삼국이 발전 과정에서 귀족세력들의 범위 또한 확대되었고, 왕권전제화가 이뤄지면서 확대된 귀족세력들은 그들의 이해관계에 따라 분열되고 대립하게 되었다. 이 중 기성귀족세력은 기존의 귀족평의체제 옹호를 통해 기득권을 유지하고자 하였고, 귀족세력 확대 과정에서
계와 관련이 있을 것이다. 아마 연개소문의 아버지 대조는 당의 경관파괴를 계기로 천리장성의 축조를 주도하면서 대당강경파의 중심인물로 활약하였던 것으로 짐작된다. 《三國史記》고구려본기에 의하면 연개소문이 장성축조 책임을 맡은 것은 營留王 25년으로 장성축조가 시작된지 11년 뒤이다. 앞
고구려가 송과 외교관계를 맺고 유연과 합세하여 동북 내몽고 지역에 있던 지두우를 분할점령하려하자 서로 예민해졌다. 하지만 서로 눈앞에 군사적인 대결 상대를 놓아두고 있었기에 분쟁을 확대할 수 없었다. 따라서 양국은 서로의 세력권을 인정하면서 빈번한 사신교환과 문물교류를 통해 우호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