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저 채만식이 이렇게 많은 필명을 자신의 작품에 사용하게 된 것에 대해 알아보기 위해서 당시 채만식의 출판관련 활동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여러 필명으로 작품을 발표하던 1930년 초에서 1934년 8월까지의 약 5년 정도의 기간 동안 채만식은 ‘개벽사’라는 출판사에서 근무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기계유씨 사이의 장자로 태어났다. 본관은 경주 자는 원춘이며 호는 추사, 완당을 비롯하여 예당, 보담재, 담연재, 승연, 현란, 과파, 노과, 승련노인 등이 세상에 널리 알려졌고 때와 장소에 따라 별호를 다르게 사용해서 그 수가 200여개나 되었다. 천재 신동으로 알려진 추사의 출생에 관하여는 그 전설
김정희(1786~1856)의 자는 원춘이며, 완당ㆍ추사ㆍ예당ㆍ시암ㆍ과파ㆍ노과 등 백여 개의 호를 가지고 있다. 경주 김씨 집안에서 정조 10년인 1786년 충청남도 예산에서 아버지 김노경과 어머니 기계유씨 사이에 장남으로 태어났으며 뒤에 큰아버지 노영에게 양자로 들어갔다. 증조부인 김한신이 영조의 사
김정희(1786~1856)의 자는 원춘이며, 완당ㆍ추사ㆍ예당ㆍ시암ㆍ과파ㆍ노과 등 백여 개의 호를 가지고 있다. 경주 김씨 집안에서 정조 10년인 1786년 충청남도 예산에서 아버지 김노경과 어머니 기계유씨 사이에 장남으로 태어났으며 뒤에 큰아버지 노영에게 양자로 들어갔다. 증조부인 김한신이 영조의 사
기계유씨사이 에서 장자로 태어났다. 추사의 집안은 친가와 외가 모두 명필로 이름난 집안으로서 김정희가 성장하여 글씨로 이름을 떨치게 된 것은 선천적인 것으로 보아도 될듯하다. 추사는 어렸을 때부터 그의 재능을 일찌감치 나타냈는데 그의 나이 7세 때 당시 재상 체제공이 추사의 글씨를 보고